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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리끼리는 과학이라는데

끼리끼리는 과학이란다. 특히 30세를 넘어가고부터는 자기 주변에 누가 있는지에 대해 변명하면 안 된다고 한다. 그전까지는 자기를 알아가고, 자기와 맞는 사람들을 찾아가도록 일종의 유예기간을 주는 것이리라. 이런저런 친구들을 만나봐야 누구와 잘 맞는지도 알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게다가 학생일 때는 단지 필요해서 친구를 사귀기도 한다. 쉬는 시간에 혼자 있기 외로우니까, 밥 같이 먹을 친구 한 명 정도는 있어야 했으니까. 졸업하고 조금만 지나도 안 보게 될 친구까지 책임지라는 건 너무 가혹하다.

그렇지만 이제 20대 후반. 내게 주어진 ‘끼리끼리 유예기간’이 거의 끝나간다. 지난 몇 년간 인간관계로 그토록 치열한 감정 소모를 한 것은 어쩌면 시기상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몇 명을 정리했고(아니면 정리당했고), 또 몇몇과의 관계는 돈독히 다졌다. 오랫동안 연락 없이 지내던 친구와 서로의 진심을 확인하며 예전의 관계를 뜨겁게 회복하기도 했다. 좋든 싫든 함께 시간을 보내던 사람과 멀어지는 건 한편으로는 후련했지만, 대체로 마음이 아팠고 진한 미련이 남기도 했다.

‘끼리끼리 유예기간'을 꽤 격정적으로 보내면서 깨달은 것은, 누군가가 슬프고 힘들 때 위로해주는 것보다 그의 행복을 진심으로 빌어주는 것이 더 힘들다는 것이다. 아무리 두툼하게 포장하려 한들 말과 표정에 섞인 가시 하나는 드러나기 마련이다. 이번에 드러나지 않더라도, 다음에는 드러난다. 나는 나를 향한 가시를 피했고, 내 마음에 못된 가시를 돋게 만드는 사람들 역시 피했다. 물론 순도 100%라는 건 없고, 누구를 향한 감정이든 겹겹이 미묘하다. 하지만 피해야할 사람이 누구인지는 생각보다 자명했다. 마음속 가시는 언젠가는 상대를 아프게 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언제나 힘들게 하고 있었으니까.

서로에게 안 좋은 감정이 없다는 걸 분명히 아는데도 좀처럼 어울리기 힘든 사람도 있다. 섬세한 정도가 서로 많이 차이나는 경우가 그렇다. 나는 생각과 감정이 섬세한 사람을 좋아하고, 쿨하고 무딘 사람들을 불편해한다. (이건 어디까지나 상대적이라, 누군가는 나를 두고 섬세함이 부족하다고 말할 것이다.) 나는 쿨한 사람들이 전혀 의도하지 않은 부분에서 혼자 의아해하고 때로는 상처 받는다. 그들의 거침 없음을 감당하는 게 너무 부담스러워서, 도무지 편하게 지낼 수가 없다. 아마 그 친구들은 별 것도 아닌 것 갖고 유난이라고, 내가 지나치게 예민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본질적으로 차이 나는 기준을 극복하기에 '서로에 대한 호감'은 너무나 일시적이고 얄팍하다. 

그런 복잡한 과정 끝에 여전히 내 옆에 남은 사람들이 있다. 아마도 ‘끼리끼리 유예기간'이 끝나는 나이인 30세를 함께 맞이하게 될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을 하나하나 떠올리자면, ‘내가 그 친구들과 감히 묶일 자격이 있을까’ 싶은 부끄러운 마음과 고마움만 가득하다. 적어도 내가 그들에게 누가 되지는 않았으면 해서, 나도 그들만큼 멋진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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