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화를 가르치던 선생님은, 기분이 안 좋은 날이면 젯소 한 통, 빈 캔버스 몇 개를 들고 작업실에 앉는다고 했다. 흰 젯소를 듬뿍 머금은 붓을 아무 생각 없이 휘두르는 건 선생님의 '틀림없이 스트레스 해소되는 방법'이었다.
딱히 풀 스트레스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오늘을 '젯소 칠하는 날'로 잡았다. 젯소 칠 된 캔버스가 있어야 마음이 든든하니까. 마침 하루종일 집에 있는 김에 비닐도 뜯지 않은 채로 방치되어 있던 캔버스들을 모두 작업방으로 불러들였다. 엽서 크기 정도 되는 캔버스 보드 세 개랑, 커다란 캔버스 네 개.
며칠 전에 개시한 이젤에 놓고 젯소 칠!
별 것 아니지만 은근히 역동적(?)이어서, 히터를 하나도 안 틀어도 열이 났다. 이젤은 사용하자마자 여기저기 젯소가 묻었다. 그림도구는 더러울 수록 멋진게 아닐까 - 하는 생각이 났다가, 쪼랩 주제에 허세스러운 느낌이 들어서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렇지만 역시 모든 도구는 세월감, 사용감 느껴지는 게 멋지다.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이렇게 작고, 엄청 못생기고, 그 와중에 반짝거려서 귀여운 화가 장식을 샀는데, 이젤에 붙일까 고민..
결국 붙였다! 검정색 아크릴 물감을 화가 발에 발라서 귀퉁이에 얹었는데, 잘 붙을런지 모르겠다.
말하자면 이젤에 캔버스를 올려놓고 작업하는 동안 나를 지켜줄 수호화가다. 정말 귀여워..
내일 유화 작업 시작할거다! 나몽이 그림 하나 시작할 예정이고, 동시에 내가 너무너무 좋아하는 David Milne 그림 하나 따라 그리기도 시작할거다. Milne의 유화를 보면 흰색을 기가 막히게 써서, 그림이 반짝이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처음 봤을 때는 밀네가 즐겨 쓴 윤기 나는 물감이 따로 있거나, 반짝거리는 마감을 위해 표면에 뭘 바른 줄 알았다. 다시 자세히 봤더니 놀랍게도 그냥 유화였다. 아무튼 밀네의 반짝거리는 작품의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 그대로 따라 그려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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